<동주>는 흑백영화다. 컬러풀한 세상에 흑백영화가 어색하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흑백의 영상을 의식할 수 없었다. 이야기에 몰입하면서 색깔이 있고 없고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준익 감독은 왜 <동주>를 흑백으로 연출했을까? 어느 날 세상이 갑자기 흑백으로 변해버린다면 어떨까?
영화 <플레전트빌>은 흑백의 세상을 상상했다. 데이빗과 제니퍼는 어느 날, TV 속 흑백 프로그램에 빨려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기계적이고 무미건조한 흑백 세상에 색깔을 퍼뜨리기 시작한다. 그들로 인해 일상의 질서가 반복되는 ‘플레전트빌’에 욕망과 미움, 분노, 자유의 혼란이 벌어진다. 흑백이 정상인 세상에서는 색깔을 갖게 된 사람이 비정상이고 위험하다. 그래서 흑백 사람들은 색깔 사람들을 재판장에 세운다.
플레전트빌, 1998, 출처: 네이버영화
동주는 일제의 시대에 한국인의 색깔을 갖고 싶어 하는 위험한 사람이다. 그도 역시 재판에 선다. “한민족에 대한 애착으로 반제국주의 행위, 치안유지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는다. 대동아 공영의 기치를 건 영광의 시대에서 불온한 사상으로 망동한 비정상인이란 선고다. ‘히라누마 도쥬’의 정상적인 삶을 거부하고 ‘윤동주'의 삶을 선택한 죄의 대가는 사회로부터의 추방, 죽음이다.
“모두가 미친 세상에서 잘 살아간다면 그야말로 가장 미친 사람”이라고 한다. 한데, 비정상인 세상에 혼자 정상으로 살아가기도 어려운 일이다. 당신은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자화상>에서 동주는 그 대답이 궁금해서 자꾸 우물 속을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왠지 현실보다는 정상 같은 우물 속 세상의 사나이를 보며 ‘내가 정말 이상한 사람이냐’고 물어보지 않았을까.
마지막까지 흑백으로 끝나버린 <동주>는 슬프다. 하지만 그처럼 나도, 비정상인 삶을 꿈꿀 수 있으면 좋겠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이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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