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iginal images: San Francisco by Anh Dinh, Nanjing in winter snow, 2008 by Emma Gawen, and Blade Runner's Johannesburg by Andrew Moore.Original images: Anh Dinh, Emma Gawen, and Andrew Moore.




 고흐가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A Neural Algorithm of Artistic Style>은 고흐의 색감과 붓 터치를 알고리듬화 해서 사진을 변환하는 방법에 대한 논문이다. 이를 이용해서 샌프란시스코와 난징, 요하네스버그가 고흐의 그림처럼 변했다. 인공지능의 발전이 그의 그림을 되살리는 것만으로 만족하게 될까? 언젠가는 그의 다른 그림과 편지, 혹은 생각까지도 복제해내고 싶지 않을까? 그게 이루어지는 날 고흐가 되살아났다고 할 수 있을까?


 '나'라는 존재는 나처럼 생각하는 패턴을 가진 유기적인 집합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처럼 생각하는 정보 프로그램이 나타난다면 나의 존재는 위협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쓴 글들은 블로그에 꾸준히 올라가고 있다. 이 문체와 어휘들을 사용하는 프로그램 정도는 곧 만들 수 있겠지. 나의 선호와 선택의 패턴들은 알게 모르게 네트워크에 데이터로 남는다. 내가 자주 가는 곳의 위치정보, 내가 사 먹은 결제정보, 인터넷 구매목록들을 모아서 나를 복제하는 날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그럼 나의 영혼이 복제된 걸까?


 생명공학 연구도 발전을 계속하고 있다. 오래 걸릴 거로 생각하지만, 언젠가는 인체를 만들어 낼 수 있겠지.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인체 합성처럼. 만들어진 육체에 복제된 나의 영혼을 불어넣으면 인간을 만들 수 있는 걸까. 죽은 사람도 데이터를 기반으로 복구할 수 있을까? 새 육신을 입고 새로운 세상에서 부활한다는 게 혹시. 설마.


 겨우 모방한 고흐의 그림에서 시작한 것치고 너무 멀리까지 생각해봤다. 고흐의 그림이 주는 영감은 그가 죽고 난 후에도 이어지고 있다.




생 라자르 역, 모네, 네이버생 라자르 역, 모네, 네이버




(시인의 산문) 

최승자


내가 발표했던 한 詩의 시작 메모이다. 


나는 잿빛으로 삭았고 

시간과 세계는 무한 잿빛으로 가라앉았고 

그래서 나는 辰辰이 cafe에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그러나 辰辰이 cafe의 그 무한 잿빛 창 너머로, 

나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미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었다. 곰삭을 대로 곰삭은 잿빛인, 

그러나 동시에 아아주 가끔씩은, 동트기 아주 전에 

새벽하늘을 물들이는 서푸른 빛과도 같은 세계를. 

심원한 남색으로 가라앉고 있는 한 풍경 


세계가 삼(三) 겹으로 시리다 


그냥 뜬금없이 다니카와 슌타로의 「슬픔」이라는 

詩를 인용해보자. 


저 파란 하늘의 파도 소리가 들리는 근처에 

무엇인가 소중한 물건을 

나는 잊어버리고 온 모양이다 


투명한 과거의 정거장에서 

유실물계 앞에 섰었더니 

나는 도리어 더 슬퍼지고 말았다.


辰辰이라는 한자는 뭐라고 읽어야 할까?


나는 '진진'이 카페에서 하루종일 노닥거렸다.

나는 '신신'이 카페에서 하루종일 노닥거렸다.


둘다 썩 내키지 않는 맛이다. 훈의 음가를 써볼까.


나는 '별별'이 카페에서 하루종일 노닥거렸다.

나는 '때때'이 카페에서 하루종일 노닥거렸다.


아니다. 이것도 아니다. 일본어나 중국어음을 써볼까.


나는 '싱싱'이 카페에서 하루종일 노닥거렸다.

나는 '첸첸'이 카페에서 하루종일 노닥거렸다.


왠지 중국어음이 맘에 든다.



별 진, 때 신, 네이버 한자사전별 진, 때 신, 네이버 한자사전










시험 기간에는 공부를 제외한 모든 게 재밌다. 그저 벽을 바라보고 있는 것조차도 너무 재밌다. 하물며 화려한 색채와 볼거리가 있는 12화의 웹툰을 보는 것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네팔의 문화이자 전설의 상징인 쿠마리의 이야기를 그린 웹툰 '시타를 위하여'를 시험 전날 보았더니 재미가 백 배다.



쿠마리는 네팔의 여신 탈레주의 화신이다. 3~5세의 여자아이 중 선발되어 살아있는 신으로 받들어진다. 가족들은 헌금을 받아 부유해지고 본인은 섬김을 받는다. 왕조차 그의 앞에서 무릎 꿇고 존대하며 축복을 기도한다.


불편한 점이 몇 가지 있을 수 있다. 첫째로, 걸어 다녀서는 안 된다. 신의 몸은 성스럽기에 그 발이 닿은 땅은 부정을 탄다. 쿠마리는 가마에 태워지거나 남에게 안겨서 이동한다. 둘째로, 감정표현을 해서는 안 된다. 신에게는 감정이 없다. 쿠마리가 웃거나 우는 것은 죽음이 임박했음을 상징한다. 셋째로, 사원 안에 격리된다. 신은 사사로이 행차하지 않는다. 쿠마리는 축제 기간 또는 정해진 날에만 외부로 나가며 공연한 대화를 하지도 못한다.


신으로 숭배받는 쿠마리의 소망은 무얼까. 만나보지 못하니 다만 상상할 뿐이다. 어쩌면 평범한 인간으로 살고 싶을지도 모른다. 평범하게 걷고 뛰어다니며, 사람들과 함께 울거나 웃으며 표현하며 살아가고 싶을지는 않을까?



인간은 신을 한계 짓는다. 신의 속성을 분류하고 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을 규정한다. 그리고 그 규정된 속성을 벗어나는 현상에 대해서는 새로운 신의 이름을 붙여 해결한다. 신이 자꾸 늘어난다. 양태론이나 삼위일체론으로 풀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어쨌든 뭔가 늘어난다. 특히, 일본의 신토가 그렇다


예를 들자면, 야훼는 완전하고 선하다는 속성을 갖는다. 그러나 이는 자연에 존재하는 불완전함과 악함을 설명할 수 없다. 악함을 포기하면 완전하지 못한 신이며, 완전함을 포기하면 때론 선하고 때론 악한 신이 된다. 자기 속성이 자기모순이다.


불완전함과 악한 속성을 분류하고 따로 떼어 데미우르고스라는 반(半)신에게 붓자. 아, 이러면 영지주의적 이원론에 빠지니까 위험한가. 그렇다면 선함과 악함, 완전함과 불완전함을 모두 가진 새로운 신을 상상한다. 그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결론이 아브락사스를 믿자는 건 아니고, 신은 신일 뿐이다는 말이다. 사람의 입장에서 그 속성을 상상하고 규정하고 한계 짓지 말자. 우리 신은 제사를 싫어하니까 너랑 못놀아. 우리 신은 우상을 싫어하니까 네 신상을 좀 부숴야겠어. 우리 신은 성실하니까 너도 검소하고 일중독이도록 해. 우리 신은 동성애를 싫어하니까 걔들은 인간도 아니야.. 그렇게 말하지 말자. 좀 그러지 좀 말자. 


그냥 진실한 눈으로 상대를 보고, 사랑하며 살자. 색안경 없이 좀 살자.




뱀발. 네 신, 내 신 따지지말고 사이즈 맞으면 함께 신자.




당당도서관 7화, 다음 만화속세상


작년 6월에 만난 곽인근 작가.

대사도 해설도 적지만 캐릭터의 마음을 공감할 수밖에 없다.

어떤 심리로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하게 되는 스토리를 만든다.


한창 재밌게 보던 그때, '멍텅구리배'라는 단어에 푹 찔렸다.

내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하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에 괜찮다는 것.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 남들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

포켓몬 스티커 모으듯이, 내일로 기차역 도장 찍듯이 갖추며 휩쓸려 살았다.


아마도 이젠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아직 좀 멍청한 배이긴 하지만, 내 배는 내가 챙겨야 하니깐.



뱀 발.

악마의 텔링텔링 열매를 먹고 그린 당당도서관에서

가장 멋지고 최고였던 심리묘사는 건널목 장면이다.




당당도서관 13화, 다음 만화속세상





별이 빛나는 밤, 위키백과




난류(turbulent flow)는 층류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무질서한 유체의 흐름을 말한다.

순간의 인상을 그린 고흐 양반에게 하늘은 무질서한 세계였을까?


관로를 지나는 유체는 레이놀즈수 2300을 임계로 층류와 난류를 구분한다.

레이놀즈수는 유체의 속도, 관로의 크기에 비례하고 유체의 점성에 반비례한다.

유체 흐름의 비선형성이 적은 층류는 공학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쓰는 장비는 대부분 난류 흐름이다. 제어가 안 된다.


층류로 강제하기 위해 작은 관로와 느린 속도를 사용한다면

느려터진 장비의 움직임에 사장님들 마음이 답답해 터져버리겠지.


세상은 느린 게 싫은가보다. 기다려주지 않고 답답해한다.

차곡차곡 선입선출하는 게 아니라, 뒷사람과 앞사람이 뒤엉켜 소용돌이친다.

그렇게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나도 그렇게 같이 뛰어나서야 할까.

뒤처지지 않기 위해. 낙오하지 않기 위해.


그건 좀 짜증 나. 다른 것에 휩쓸리지 않는 나의 흐름을 만들면 좋겠다.

주류와 따로 떨어진 vortex 흐름처럼...

아, 그게 낙오하는 거랑 똑같은 건가. 그렇다면 자발적 낙오자인 정도로 치자.



뱀 발. 고흐 양반이 사랑한 사이프러스 나무는 죽음과 부활을 상징한다던데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 http://www.metmuseum.org



난류의 시각화, 위키백과




빈센트 반 고흐, 감자먹는 사람들, 네이버

 

 

감자 먹는 사람들 - 삽질 소리

정진규

 

우리들도 그렇게 둘러앉아

삶은 감자를 먹던 때가 있었다

불빛 흐린

언제나 불빛 흐린

저녁 식탁이

누구의 손 하나가 잘못 놓여도

삐걱거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셋째 형만이

언제고 떠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잘 삶아진 굵은 감자알들처럼

마디 굵은 우리 식구들의 손처럼

서걱서걱 흙을 파고 나가는

삽질 소리들을 꿈속에서도 들었다

누구나 삽질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타고난 사람들이었다

새벽에는

빗줄기가 조금 창문을 두드렸다

제일 부드러웠다

새싹들이 돋고 있으리라 믿었다

오늘은 하루쯤 쉬어도 되리라

식구들은 목욕탕엘 가고 싶었다

 

 

농부를 그린 그림이지만

나는 탄광 생각을 한다.

 

유재석이 차승원이

황정민이 오달수가

 

새까매진 하루를 씻으러

목욕탕엘 가면 좋겠다.

 

 

 

 

나에게 그림한점은 즐겁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것이어야한다.

그렇다. 예뻐야만 한다! 

삶에는 골치 아프게 하는 것들이 충분히 많다.

그러니까 즐겁지 않은 것들은 이제 더는 그릴 필요가 없다.

 

행복을 그리는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베르트 모리조에게 보낸 편지 중

 

 

 

 

 

"우리는 누구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내가 누구인지 안다는 것은 죽음이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지 안다면,

어떻게 살 것인지에 답할 수 있다.

 

 

 

 

 

졸업 이후로 푸른 색이 좋다.

 

푸른색이 말하는 정직함, 신뢰. 안정감도 좋고

그 냉정함과 우울함마저 조으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단순한 몇 가지의 법칙이 전체를 이루는

고전 과학자들이 원하던 질서의 세계.

 

그러나,

우연인지 신의 의지인지 모를

불확정성의 원리에 따르는 실재.

 

실재를 반박하고 싶었던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여전히 살지도 죽지도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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