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패는 아마도 세끗쯤 되는 별볼일 없는 것이었으리라. 세끗이 광땡을 이길 가능성은 애당초 없다. (...) 어서어서 판이 끝나고 새로운 패를 받는 길. 그 길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한번 주어진 패를 들고 상대의 패를 가늠하며 정해진 판돈을 두고 서로 속여야 하는 도박을 인생으로 비유하다니, 게다가 패가 좋지 않으면 빨리 죽고 다음 생을 노리는 것만이 희망이라니, 이 사람은 무서운 사람이다. 그런 고민을 던져주고는 치밀하게, 철저하게 자살하는 방법을 소설로 늘어 놓으니 무서운 정도를 넘어 사악하고 잔인한 사람이다. (해로운 놈이다)
도박과 전략이라니, 배신왕 내쉬 형님이 떠오른다. 일회성 게임에서 가장 합리적인 우월전략은 상대를 배신하는 것. 따지고 들어가면 반복성 게임에서도 합리적인 전략은 상대를 배신하는 것. 일회적이고 표면적인 관계의 사회에서 합리적인 사람은 상대를 믿으면 안된다. "나를 배신한다면 처절한 응징을 당할 것이야."하는 시그널을 주어야 한다. 위약금, 손배금, 위자료.. 계약을 작성하고 소송을 준비한다. 전문적으로 대행하는 직업도 있다. 착한 사람은 비합리적이다. 약하고 답답하고 물러 터졌다. 개패를 들고 나왔으니 당해도 싸다. 이렇게 사회에 게임을 빗대고 보니 나도 잔인하고 합리적인 사람이 된 것 같아 뿌듯하다. (해로운 놈이 되었다)
적당한 패를 들고 태어나 적당히 눈치를 보며 살아간다. 강한척 쿨한척 합리적인척 하고 살아간다. 근데, 이런 합리적인 세상에 살고 싶진 않다. 비정하고 사람 답지 못하다. 헤어진 애인이 나를 차놓고 기뻐하고 잘살고 있다고 해서 저도 기쁜척 통쾌한척 홀가분한척 하는 사람은 매력이 없다. 숨도 못 쉬어 가슴을 부여잡고 세상이 끝난 듯 목 놓아 울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사람 내음 나는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다. 어떤 천재 수학자 형님의 수식과 행렬을 믿기 보다는, 오 리를 가자 하면 십 리를 가주라 가르치는 어떤 사막 노숙인 아저씨를 믿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내 생각에.. 십 리는 좀 많고, 두어 리 정도는 같이 가줄 수 있겠지 싶다. (이로운 생각을 하였다)
어쨌든 자살하는 소설은 싫다. 해로운 소설이다.
근데 이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이로운 소설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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