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저자
김영하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1996-08-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96년 제1회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수상한 김영하의 장편소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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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패는 아마도 세끗쯤 되는 별볼일 없는 것이었으리라. 세끗이 광땡을 이길 가능성은 애당초 없다. (...) 어서어서 판이 끝나고 새로운 패를 받는 길. 그 길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한번 주어진 패를 들고 상대의 패를 가늠하며 정해진 판돈을 두고 서로 속여야 하는 도박을 인생으로 비유하다니, 게다가 패가 좋지 않으면 빨리 죽고 다음 생을 노리는 것만이 희망이라니, 이 사람은 무서운 사람이다. 그런 고민을 던져주고는 치밀하게, 철저하게 자살하는 방법을 소설로 늘어 놓으니 무서운 정도를 넘어 사악하고 잔인한 사람이다. (해로운 놈이다)

도박과 전략이라니, 배신왕 내쉬 형님이 떠오른다. 일회성 게임에서 가장 합리적인 우월전략은 상대를 배신하는 것. 따지고 들어가면 반복성 게임에서도 합리적인 전략은 상대를 배신하는 것. 일회적이고 표면적인 관계의 사회에서 합리적인 사람은 상대를 믿으면 안된다. "나를 배신한다면 처절한 응징을 당할 것이야."하는 시그널을 주어야 한다. 위약금, 손배금, 위자료.. 계약을 작성하고 소송을 준비한다. 전문적으로 대행하는 직업도 있다. 착한 사람은 비합리적이다. 약하고 답답하고 물러 터졌다. 개패를 들고 나왔으니 당해도 싸다. 이렇게 사회에 게임을 빗대고 보니 나도 잔인하고 합리적인 사람이 된 것 같아 뿌듯하다. (해로운 놈이 되었다)

적당한 패를 들고 태어나 적당히 눈치를 보며 살아간다. 강한척 쿨한척 합리적인척 하고 살아간다. 근데, 이런 합리적인 세상에 살고 싶진 않다. 비정하고 사람 답지 못하다. 헤어진 애인이 나를 차놓고 기뻐하고 잘살고 있다고 해서 저도 기쁜척 통쾌한척 홀가분한척 하는 사람은 매력이 없다. 숨도 못 쉬어 가슴을 부여잡고 세상이 끝난 듯 목 놓아 울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사람 내음 나는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다. 어떤 천재 수학자 형님의 수식과 행렬을 믿기 보다는, 오 리를 가자 하면 십 리를 가주라 가르치는 어떤 사막 노숙인 아저씨를 믿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내 생각에.. 십 리는 좀 많고, 두어 리 정도는 같이 가줄 수 있겠지 싶다. (이로운 생각을 하였다)

어쨌든 자살하는 소설은 싫다. 해로운 소설이다.
근데 이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이로운 소설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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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숲을 거닐다

저자
장영희 지음
출판사
샘터사 | 2005-03-15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조선일보의 '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 코너에 실렸던 장영희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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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한번도 무슨 대단한 영감이 떠올라 그것을 다른사람들에게 전하고픈 욕망에 불타서 글을 쓴 적이 없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내가 글을 쓴는 것이 아니라 신이 내 어깨를 움직여 글을 쓴다"고 했지만, 나는 셸리나 소로 같은 천재가 못되니 영감만을 기다리고 앉아 있을 수 없는 노릇이다.

"애당초 글을 쓰지 않고 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꼭 써야 한다면 무조건 써라. 재미없고, 골치 아프고, 아무도 읽어 주지 않아도 그래도 써라.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고, 남들은 다 온다는 그 '영감'이라는 것이 오지 않아도 그래도 써라. 기분이 좋든 나쁘든 책상에 가서 그 얼음같이 냉혹한 백지의 도전을 받아들여라." - J.B. 프리스틀리


정말로 글을 쓰기엔 너무나 귀찮고 피곤한 날이다. 딱히 쓰고 싶은 내용도 없고 별로 알리고 싶은 생각도 없이 무기력하다. 어느날이든 무기력이 폭풍처럼 몰려올 때가 있다. 신나고 정신 없고 즐거운 시간이 지난 다음날, 혼자 누워 있다보면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싶을 때가 있다. 그런 날은 정말 숨만 쉬는 것도 벅찬 것이다.

 

그래도 어쨌건 일어나야 한다. 꾸역꾸역 일어나 걷고,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백지처럼 막막한 하루의 얼굴을 또 마주해내야 하는 것이다.

 

 

 

"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극복하고 살아가는가를 가르친다." - 윌리엄 포크너

문학은 삶의 용기를, 사랑을, 인간다운 삶을 가르친다. 문학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치열한 삶을, 그들의 투쟁을 그리고 그들의 승리를 나는 배우고 가르쳤다. 문학의 힘이 단지 허상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도 나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


매스미디어의 발전에 따라 웃방 냉골 뒤켠으로 밀려나버린 문학이다. 그에게 나는 무엇을 배워야하는 것일까.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시대의 트렌드를 따라가기에는 오히려 네이버 실시간 검색이 낫겠다. 그럼에도 못난이 종이책을 붙잡고 씨름하고 고민하는 것은, 인간다운 이야기들이 허상이 아닌 현실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닐까.

 

 

 


 

 

 

나름의 시작을 하는 이야기를 하자면

뚜벅뚜벅 성실히 걸은 것들을,

죽는 날까지 남겨놓기 위해서 그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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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을 수 없는 사랑을 하고

견딜 수 없는 아픔을 견디며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이룰 수 없는 꿈을 꾸자.

 

어떤 이의 홈피에 있던 문구인데

알고보니 돈키호테의 내용이고

한비야가 인용했었다.

 

한비야는 미리 계획한 바를 완벽히 준비하고

긏지 않는 열정으로 폭발시키는 이.

 

다르게랄까, 장영희는 더이상 미룰 수 없을 때까지 미루고

사소한 잔실수, 엉성한 계획으로 일을 망치지만

원망과 후회속에서도 다시 일어나 뚜벅뚜벅 성실히 걷는 이.

 

한비야를 닮은 그 친구의 삶을 동경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장영희과다.

 

장영희 선생님은 작년 5월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분의 글을 처음 만난것이 작년 7월이니,

이미 돌아가신 분의 흔적을 밟은 셈이다.

 

그땐 돌아가신줄도 모르고, 꼭 살아주시길 바랬는데.

 

죽음은 왠지 가깝다.

그는 죽었고, 그의 글은 남았지.

나는 죽는날까지

무엇을 남겨놓으면서 살아갈까.

 

말 잘하는 이보단, 글 잘쓰는 이가 되고싶고.

야무지고 똑바른 사람보단, 무르고 비딱한 사람이고싶다.

어딘지 모르게 어수욱한, 인간의 내음을 풍기며 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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