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일이 어느 날 우연히 들이닥칠 수 있다.

생각지도 않던 일에서 오오 하는 환호를 들을 수 있다.


좋아해서 잘하는 것인지, 잘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인지는 잘 모른다.

어쨌든 좋아하고 잘하는 것은 물고 물리는 관계이지 않을까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선 누군가의 칭찬이 필요할 수 있다.

"넌 이거 잘해"라는 말로 인해 좋아하는 일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시도하고 피드백 받아보는 것이다.

교탁 앞에서 부끄럼과 비웃음이 두려워 노래하지 못했더라면,

전국노래자랑 심사위원 앞에서 노래하는 일 따위는 상상할 수 없지 않은가.


또 하루 멀어져간다.

멀어져가는 하루 앞에서 뭐 하나라도 더 시도해보자.



멀어져 가는 저 뒷모습을 바라 보면서

난 아직도 이 순간을 이별이라 하지 않겠네

달콤했었지 그 수많았던 추억속에서

흠뻑 젖은 두마음을 우리 어떻게 잊을까


아 다시 올거야 너는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아 나의 곁으로 다시 돌아 올거야

그러나 그 시절에 너를 또 만나서 사랑할 수 있을까

흐르는 그 세월에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려나


달콤했었지 그 수많았던 추억속에서

흠뻑 젖은 두 마음을 우리 어떻게 잊을까


아 다시 올거야 너는 외로움을 견딜 수 없어

아 나의 곁으로 다시 돌아 올거야

그러나 그 시절에 너를 또 만나서 사랑할 수 있을까

흐르는 그 세월에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려나


그러나 그 시절에 너를 또 만나서 사랑할 수 있을까

흐르는 그 세월에 나는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려나








허리가 뻐근하고 머리가 띵할 정도로 늦게 일어나는 날이 있다. 새소리를 얼핏 들은 것 같은데, 조금만 더 자다 보면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다. 분명 전날엔 계획이 있었다. 계획을 실천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하루를 마주할 때면 왠지 모를 자괴감이 엄습한다. 잠을 좀 더 자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잊을 수 있을까 고민한다. 그러면 자책감이 한층 더 많이 몰려올 것을 안다. 그런 날이면 사람이기보다는 마치 벌레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웹툰 우리가 바라는 우리(우바우)웹툰 우리가 바라는 우리(우바우)



어느 날 아침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끔찍한 벌레로 변한 것을 알아차렸다.


프란츠 카프카 선생도 이런 아침에 소설 '변신'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외판원으로 일하는 그레고르는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신 당한다. 은퇴한 부모님과 어린 여동생을 부양하고 집안의 빚을 갚기 위해 성실히 일해 왔는데, 하루아침에 직장에도 못 나가는 집안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걱정하고 슬퍼하던 가족들은 슬슬 그를 두려워하고 혐오한다. 점차 그가 그레고르가 맞는지 의심하고 배척한다. 벌레가 된 그레고르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벌레 그레고르는 자신의 몸에 익숙해진다. 빠르게 움직이는 것도 가능하고, 벽이나 천장에 매달려 있기를 좋아하게 된다. 차라리 그가 집 밖으로 나가 숲 속에서 벌레의 삶을 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어차피 가족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다시 취직했고 그레고르가 가족을 부양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은근히, 가족들은 그레고르가 나가길 바라고 있다.


영화 '돌연변이'는 그 비슷한 생각을 엔딩으로 삼는다. 제약회사의 생동성 시험에 참여했다가 생선 인간이 되어버린 박구의 상황은 갑자기 벌레가 되어버린 그레고르와 비슷하다. 그리고 박구는 자신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에게 시달리다가 인간의 세상을 등지고 바다로 간다. 인간으로 되돌려 주겠다는 박사의 제안도 뒤로 한 채 그 넓은 바다로 헤엄쳐나간다. 어찌 보면 그는 운명을 스스로 개척했다. 근데 이게 뒷맛이 계속 찜찜하다.



영화 돌연변이영화 돌연변이



분수에 맞게 살라고 한다. 너답게 살라고 한다. 근데 그게 벌레답게, 혹은 생선답게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닐 것 같다. 어려운 상황이라도 인간답게 사는 것을 포기해선 안 되는 것 같다. 인간성은 주어진 것이다. 누군가 빼앗을 수 없으며, 스스로 팽개칠 수도 없다. 그러나 요즘은 스스로 인간성을 던져버리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인간 세상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우린 나 자신의 인성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타인의 인성까지 챙겨줘야 하는 세대를 사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레테의 연주는 매우 훌륭했다. 고개를 옆으로 약간 기울이고, 감상에 젖은 듯이 슬픈 표정으로 악보를 눈으로 따라갔다. 그레고르는 조금 더 앞으로 기어나갔다. 그리고 혹시나 그레테의 시선과 마주치기를 기대하면서, 고개를 마루 위에 바싹 붙이다시피 하며 수그렸다. "이처럼 음악 소리에 감동을 느끼는데도, 내가 벌레란 말인가?"


그레고르도 박구도 결국 세상에서 잊힌다. 그러나 그레고르는 스스로가 벌레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인간으로 되돌아가길 바랐다. 방에 걸린 그림을 지키고 싶어 했고, 동생의 바이올린 연주를 감상하고 싶어 했다. 인간에 대한 소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박구는 생선으로 살았지만, 그레고르는 인간으로 죽었다.


아아, 말테야. 우리는 그냥저냥 사라져 간다. 내 생각에는 모두들 너무 정신이 산만하고 바빠서, 우리가 사라질 때에도 별로 주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마치 별똥별 하나가 떨어져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고 소원을 비는 사람도 없는 것처럼. 너는 소원 비는 것을 잊지 마라, 말테야. 사람은 소원을 포기하면 안 된다. 소원이 꼭 이루어진다고 믿지는 않지만, 평생 동안 지속되기 때문에 그 성취를 기다릴 수도 없는 그런 소원들도 있단다. <말테의 수기>



 

변신
국내도서
저자 :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 김시오역
출판 : 브라운힐 2015.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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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라자르 역, 모네, 네이버생 라자르 역, 모네, 네이버




(시인의 산문) 

최승자


내가 발표했던 한 詩의 시작 메모이다. 


나는 잿빛으로 삭았고 

시간과 세계는 무한 잿빛으로 가라앉았고 

그래서 나는 辰辰이 cafe에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그러나 辰辰이 cafe의 그 무한 잿빛 창 너머로, 

나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미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었다. 곰삭을 대로 곰삭은 잿빛인, 

그러나 동시에 아아주 가끔씩은, 동트기 아주 전에 

새벽하늘을 물들이는 서푸른 빛과도 같은 세계를. 

심원한 남색으로 가라앉고 있는 한 풍경 


세계가 삼(三) 겹으로 시리다 


그냥 뜬금없이 다니카와 슌타로의 「슬픔」이라는 

詩를 인용해보자. 


저 파란 하늘의 파도 소리가 들리는 근처에 

무엇인가 소중한 물건을 

나는 잊어버리고 온 모양이다 


투명한 과거의 정거장에서 

유실물계 앞에 섰었더니 

나는 도리어 더 슬퍼지고 말았다.


辰辰이라는 한자는 뭐라고 읽어야 할까?


나는 '진진'이 카페에서 하루종일 노닥거렸다.

나는 '신신'이 카페에서 하루종일 노닥거렸다.


둘다 썩 내키지 않는 맛이다. 훈의 음가를 써볼까.


나는 '별별'이 카페에서 하루종일 노닥거렸다.

나는 '때때'이 카페에서 하루종일 노닥거렸다.


아니다. 이것도 아니다. 일본어나 중국어음을 써볼까.


나는 '싱싱'이 카페에서 하루종일 노닥거렸다.

나는 '첸첸'이 카페에서 하루종일 노닥거렸다.


왠지 중국어음이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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