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참의 이놈. 날 은근히 무시했것다. 내 굳이 널 시켜 네 집보다 난 집을 살 테다. 네깟놈이 천생 가쾌지 별거냐.


보여줄 테다. 복수할 테다. 너보다 난 사람이란 걸 증명할 테다. 나도 한다면 하는 놈이란 걸 알려줄 테다. 날 무시한 것을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줄 테다. 오기를 부린다. 절치부심, 와신상담. 이를 갈고 담을 씹으며 나를 비웃은 이들에게 한 방 날려주고 보일 미소를 연습한다.


꼭 상자를 찾겠다며 눈을 희번덕이는 형돈이 형만의 이야기일까. 안경다리 고칠 값은 없지만 집을 살 예정인 안 초시만 그렇게 생각할까. 언젠가 연 25만 불 이상의 사장님이 될 테니 부자 증세는 안 된다는 배관공 조님에게만 해당하는 말일까.


내 삶이 어디로 향하는지 생각하며 살고 있나. 하루하루 고통을 무릅쓰고 실패를 이겨낸 후에 만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그 끝에서 만난 상자가 우리를 파멸시킬 걸 알면서도, '쥑이는' 손맛을 한 번 보기 위해 열어야만 한다면.






참의는 우선 미닫이를 닫고 눈을 부비고 초시를 들여다보았다. 안 초시는 벌써 아니요, 안 초시의 시체일 뿐이었다. 방 안을 둘러보니 무슨 약병 하나가 굴러져 있었다.





복덕방

저자
이태준 지음
출판사
종합출판범우(BW범우) | 2012-04-1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한국 단편문학의 대가, 비경향문학이 낳은 가장 출중한 작가 이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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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재, 초인시대, TvN


혼밥(혼자 먹는 밥)이란 말이 새로 생겼나 보다. TV에서도 자주 볼 수 있게 되었다. 'MBC 다큐스페셜-지금 혼밥하십니까?'에서 다루더니 '나 혼자 산다'나 '식샤를 합시다'를 통해 종종 만난다. '초인시대'의 유병재는 화장실에서 혼밥을 한다.


혼자 사는 가구가 늘었다. 누군가를 만나 식사할 시간이 없다. 약속 잡기도 귀찮다. 개인화로 인해 간섭받는 걸 싫어한다. 어떤 분들은 혼밥의 원인을 분석하기도 하고, 또 어떤 분들은 혼밥족의 건강을 염려해 주기도 한다. 고맙기도 해라!


YTN science


혼자 먹는 밥에 입문한 지가 좀 되었다. 고등학생 때까지야 그런 기회가 없었지만, 대학에 입학하고 보니 밥 약속 잡는 게 은근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처음엔 테이크아웃 김밥을 받아 도서관 계단에서 몰래 먹기도 했다. 차츰 휴게실이나 복도 같은 곳으로 김밥 까먹는 장소가 대담해지더니, 이내 구내식당과 도서관 사이의 모든 벤치가 나의 뻔뻔한 식탁이 되었다. '길밥'의 기쁨을 아는 몸이 되어 버린걸.


원래는 어쩔 수 없기 때문이었는데, 내 성향에 잘 맞는다. 전역 후로는 메뉴의 다양성을 추가해 식당과 배달음식과 일반음식점으로 범위를 넓혔다. 곧 밥 먹기의 영역을 넘어 영화 보기, 여행 가기, 콘서트, 뮤지컬까지 확장한다. 혼자 할 수 있는 게 너무 많네. 소피아 뎀블링 선생은 어쩌다 시작하셨는지 모르겠지만, 혼자 놀기에 대한 선생의 말은 개운하다.


나는 '혼자 가는 것'을 좋아한다. 혼자 영화 보러 가는 걸 좋아하고, 딱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눈길들은 그냥 무시한다. 때문에 그런 눈길일랑은 다른 사람들에게 보내는 게 더 마땅하다. 끔찍한 첫 번째 데이트를 하고 있을 여자, 아내 손에 이끌려 극장에 온 남자, 수다스러운 친구의 중계방송을 계속 들어야 하는 여자. 하지만 내게는 캐러멜 캔디와 편안한 의자가 있고, 아무도 나를 성가시게 하지 않는다.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나는 외롭지 않다. 나는 그저 혼자 가는 것이다.



물론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다. 잘 안다. 내게 순발력이나 적극성이 없는 것도 잘 알고 있고, 깨알같이 피드백 받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너무 조용해." 이건 팀장님 말씀. "좀 더 활발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대학원에서 같이 공부하는 형님 말씀. "타인의 이야기에 대해 의견 제시가 거의 없음" 이미지 트레이닝 과정에서 받은 얘기.


근데, 나는 내가 원하는 것과 잘하는 것이 뭔지 알고 있다. 내 성격은 사교성의 부재나 부족이 아니다. 일부로 적극적이고 신나고 활발할 수 있지만, 그건 내가 갖고 싶은 가치랑 잘 안 맞는다. 안 그래도 번잡한데, 꼭 나까지 나서서 시끄러워야 해? 난 좀 생각해봐야겠다.


나는 깊은 사고와 빠른 사고를 바꾸고 싶지 않다. 우리는 단지 행동이 느릴 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을 때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도 느리다. 나의 뇌는 온갖 것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모든 각도에서 살피기 때문에 반응하는 데 남들보다 오래 걸린다. 나는 어떤 생각을 표현하기 전에 여러 방향으로 생각해 본 다음 결정한다.



희망적인 얘기로 글을 마무리해야지. 외향적인 사람들은 내성적인 사람을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말로 표현하지 않으니 속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거절당하거나 뒤통수 맞을까 걱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사람은 싫어하는 사람과 이야기하지 않는다. 내성적인 사람은 추가로, 딱히 좋거나 싫지 않은 사람들과 얘기하지 않는다. 따라서 내성적인 사람이 당신과 얘기하고 있다면, 그는 당신을 좋아하는 거다. 꽤나 좋아할지도 모른다. 어려워할 필요가 없다.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열어주지 않는 문을 당신에게만 열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당신의 진정한 친구이다.






나는 내성적인 사람입니다

저자
소피아 뎀블링 지음
출판사
책읽는수요일 | 2013-05-24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미국 심리학전문저널 "사이콜로지투데이"의 인기 코너 ‘내성적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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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기간에는 공부를 제외한 모든 게 재밌다. 그저 벽을 바라보고 있는 것조차도 너무 재밌다. 하물며 화려한 색채와 볼거리가 있는 12화의 웹툰을 보는 것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네팔의 문화이자 전설의 상징인 쿠마리의 이야기를 그린 웹툰 '시타를 위하여'를 시험 전날 보았더니 재미가 백 배다.



쿠마리는 네팔의 여신 탈레주의 화신이다. 3~5세의 여자아이 중 선발되어 살아있는 신으로 받들어진다. 가족들은 헌금을 받아 부유해지고 본인은 섬김을 받는다. 왕조차 그의 앞에서 무릎 꿇고 존대하며 축복을 기도한다.


불편한 점이 몇 가지 있을 수 있다. 첫째로, 걸어 다녀서는 안 된다. 신의 몸은 성스럽기에 그 발이 닿은 땅은 부정을 탄다. 쿠마리는 가마에 태워지거나 남에게 안겨서 이동한다. 둘째로, 감정표현을 해서는 안 된다. 신에게는 감정이 없다. 쿠마리가 웃거나 우는 것은 죽음이 임박했음을 상징한다. 셋째로, 사원 안에 격리된다. 신은 사사로이 행차하지 않는다. 쿠마리는 축제 기간 또는 정해진 날에만 외부로 나가며 공연한 대화를 하지도 못한다.


신으로 숭배받는 쿠마리의 소망은 무얼까. 만나보지 못하니 다만 상상할 뿐이다. 어쩌면 평범한 인간으로 살고 싶을지도 모른다. 평범하게 걷고 뛰어다니며, 사람들과 함께 울거나 웃으며 표현하며 살아가고 싶을지는 않을까?



인간은 신을 한계 짓는다. 신의 속성을 분류하고 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을 규정한다. 그리고 그 규정된 속성을 벗어나는 현상에 대해서는 새로운 신의 이름을 붙여 해결한다. 신이 자꾸 늘어난다. 양태론이나 삼위일체론으로 풀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어쨌든 뭔가 늘어난다. 특히, 일본의 신토가 그렇다


예를 들자면, 야훼는 완전하고 선하다는 속성을 갖는다. 그러나 이는 자연에 존재하는 불완전함과 악함을 설명할 수 없다. 악함을 포기하면 완전하지 못한 신이며, 완전함을 포기하면 때론 선하고 때론 악한 신이 된다. 자기 속성이 자기모순이다.


불완전함과 악한 속성을 분류하고 따로 떼어 데미우르고스라는 반(半)신에게 붓자. 아, 이러면 영지주의적 이원론에 빠지니까 위험한가. 그렇다면 선함과 악함, 완전함과 불완전함을 모두 가진 새로운 신을 상상한다. 그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결론이 아브락사스를 믿자는 건 아니고, 신은 신일 뿐이다는 말이다. 사람의 입장에서 그 속성을 상상하고 규정하고 한계 짓지 말자. 우리 신은 제사를 싫어하니까 너랑 못놀아. 우리 신은 우상을 싫어하니까 네 신상을 좀 부숴야겠어. 우리 신은 성실하니까 너도 검소하고 일중독이도록 해. 우리 신은 동성애를 싫어하니까 걔들은 인간도 아니야.. 그렇게 말하지 말자. 좀 그러지 좀 말자. 


그냥 진실한 눈으로 상대를 보고, 사랑하며 살자. 색안경 없이 좀 살자.




뱀발. 네 신, 내 신 따지지말고 사이즈 맞으면 함께 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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